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7-11 예화) 아들의 희생으로 얻은 생명 스위스의 작은 산간 마을을 순회하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버스 운전사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운행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승객을 가득 채운 버스가 언덕길을 내려오는 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버스의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언덕을 다 내려가려면 다섯 고개를 돌아야 했습니다. 승객들은 버스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운전사는 침착하게 다섯 고개를 돌아 마을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안전하게 마을의 평지에 버스를 정차시키면 되었습니다. 버스가 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 아이들이 길 한복판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는 급하게 경적을 울렸으며 아이들은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만은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갈등을 했습니다.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핸들을 돌리면 많은 승객들이 죽거나 다칠 수 있었습니다. 승객을 살리려면 그 아이를 희생시켜야만 했습니다. 운전사는 그 아이를 밀어 버렸고 차는 멈추어 섰습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아이를 안았지만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운전사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 책망과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 때 한 청년이 승객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운전사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품에 있는 아이는 운전사의 아들입니다.” 운전사는 승객들을 살리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어떻게 되었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나 일’ 입니다. 사랑과 관련된 단어는 은혜, 인애, 긍휼, 자비 등입니다. 반면에 반대가 되는 단어는 증오, 혐오, 미움 등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헬라어에 사랑을 대표하는 단어는 에로스와 스트로게와 필레오와 아가페입니다. 에로스는 남녀 간의 성적인 사랑을, 스트로게는 혈연에 대한 가족의 사랑을, 필레오는 친구간의 사랑을, 아가페는 희생적인 신적인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사랑에 대해 언급하면서 어떤 단어를 사용했습니까? 7절과 8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고 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6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 단어는 아가ㅍ페토스, 아가파오, 아가페입니다. 그 사랑이라는 단어는 모두 ‘아가페’ 가 어원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신적인 사랑,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가페의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로서 마땅한 삶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에 있습니까? 요한은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불신앙과 불순종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으며, 항상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평안과 안식을 주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때 무엇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사랑이 증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7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성도들의 정체성에 관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증거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냐? 아니면 마귀냐? 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장 10절은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고 합니다. 마귀에게 속한 사랑은 욕망적이고 이기적이고 조건적인 것이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랑은 영적이고 이타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누구에게 속한 자인가? 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을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 사람들과 그 사랑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사랑을 하고, 자기 행복만을 위해 사랑을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며, 사랑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통해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셋째, 사랑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지식과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과 체험적인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은 지식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인격적이고 관계적이고 경험적인 것입니다. F.F 브루스는 ‘생활 속에서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형태의 주장을 펼지라도 하나님을 안적이 없음을 그 사실을 통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사랑을 구현한다는 것을 뜻한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자는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며,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지난 2012년 2월 26일에 헌법재판소는 ‘간통을 처벌하도록 하는 형법 제24조는 위헌’ 이라는 결정을 했습니다. 이러한 조항을 폐지하기로 하는 주장들은 모두 남, 녀간의 사랑을 정부가 법으로 관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개인적인 감정인 동시에 그 사랑이 변질 되면 불륜이 되고 소중한 가정에 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도들에게 있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왜곡과 변질된 사랑은 파괴적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9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인생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 사랑으로 영혼이 살고, 가정이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살아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10절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 합니다. 최용덕작사 작곡의 ‘오늘 나는’ 이라는 복음 성가에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교만한 나의 마음이여’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말고 먼저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9절은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고 하며, 10절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고 합니다. 여기에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화목제물로 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희생에 없는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은 자로,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이제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나아가 이웃과 교회를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알았음으로, 이제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해야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결단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의 핵심 단어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성품은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도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사랑은 개인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