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분별력을 가지라 요한일서 4:1-6 예화) 대소변 가리기 생후 18개월 24개월이 되면 대소변 가리는 교육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29개월이 되면 대변을, 32개월이면 소변을 가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종종 대소변을 가려야 시기인 4세가 지나도 대변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유분증, 5세가 지나도 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유뇨증이라고 합니다. 유뇨증은 5세에 약 3~7퍼센트, 10세 이상에서 약 2~3퍼센트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대소변을 가리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18개월에서 3세까지를 항문기라고 합니다. 이때는 대소변 가리기 훈련을 중심으로 해서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아이는 자신이 만들어낸 대변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하고, 대변을 참을 수도 배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신체의 자율성을 시험하고 기뻐합니다. 이 시기에 너무 일찍 대소변 가리기 훈련을 하거나, 아이가 실수한다는 이유로 가혹한 처벌을 하면 아이의 마음속에 부모에 대한 분노와 공포가 생겨 투쟁적 관계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아이의 성격은 두 방향으로 발달할 수 있는데, 엄마에게 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복종의 길을 선택하면 강박적 성격이 되고, 반대로 반항을 선택하면 폭발적 성격이 됩니다. 그래서 프로이드는 대소변을 가리는 시기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대소변을 가리는 것은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분별하는 최초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분별과 관련하여 사람의 변과 관련된 관용적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똥오줌을 못 가리냐?’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아냐?’ 는 것입니다. 이 말들은 모두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것입니다. 분별력은 무엇입니까? 옳고 그름을 적당하게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또한 일의 이치를 구별하여 가르는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분별력이 있어야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성숙한 인격을 갖추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바로 분별력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분별력이 중요한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분별력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영적 분별력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영적 분별력에 대해 무엇을 교훈하며 권면하고 있습니까? 첫째, 영적 분별력의 필요성입니다. 요한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복음을 전하던 순례 전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교회가 허락하면 복음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을 정성으로 영접하고 환대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었으며,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도 가져야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종종 이들 중에 순전한 복음이 아닌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초대 교회에 있었던 아름다운 관습을 악용하여 잘못된 교리를 전했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순전한 것인지, 아니면 왜곡된 것인지 분별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요한이 활동하던 시대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노시스 즉 영지주의였습니다. 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도 바로 이 영지주의로부터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기에 요한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고 합니다. 요한은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분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모든 교리에 대한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이 수용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 분별력을 갖고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분별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성경이 진리에 대한 유일하고 객관적인 진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만이 영적 분별의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이냐? 아니냐? 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적인 것이라면 우리 자신의생각과 뜻을 포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 자신이 속한 교파나 교단의 교리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교파나 교단의 교리를 잘못된 것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교파와 교단의 교리를 더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비성적인 것이 아니라 더 강조하는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총회는 우리 교단의 이념에 관해 ‘본 교단은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파 신학(Reformed Theology)을 근본 신앙으로 하여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 문답을 교리적 표준으로 삼고, 장로교 헌법의 정치원리를 가지며 교회의 전통과 권위 및 질서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현재 명실상부한 한국 교회 최대의 공교단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셋째, 인격적이고 거룩한 삶입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이 항상 신앙적인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거룩하고 온전한 삶은 성경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일 뿐만 아니라 빛의 자녀로 빛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영적인 미혹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를 출석하느냐? 어떤 목회자를 만나느냐? 어떤 성도들과 영적 교제를 나누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요즈음은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통해 비성경적인 것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주 접하면서 순전한 신앙이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분별력 없이 수용하는 것은 영적 미혹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세가 될수록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영적 분별력을 갖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영적 분별력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2절은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이 성육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떠한 분으로 인정하는가?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제자들을 훈련하시고 마지막 치르신 졸업시험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배운 교훈에 대해 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행했던 능력을 이제 내 앞에서 보이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을 고백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고백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영 즉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그 누구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성경에 근거한 바른 신앙 고백과 그 고백에 따른 온전한 인격과 생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른 신앙 고백과 그 고백에 따르는 삶을 통해 예수님을 전하는 자로,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영적 분별력은 세상을 이기며 말씀을 듣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했으며, 세상을 이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4절은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고 합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의 진리의 영에 속했느냐 아니면 사단의 미혹의 영에 속했느냐? 를 분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5절은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고 합니다. 미혹의 영에 속한 자들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말을 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말을 듣기 좋아하고 싫어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 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상에 속한 말을 한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가치관의 지배를 받아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자의 삶이 아니라 땅에 속한 자로 살아갑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는 자가 아니라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관심, 가치관은 과연 성경적인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하늘에 속한 것입니까? 반면에 진리의 영에 속한 자는 어떻습니까? 6절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말을 듣고’ 라는 것은 그 당시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며, 지금은 사역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영에 속해 있기 때문에 말씀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거나 적대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말씀을 잘 듣지 않습니다.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꿀 송이 같은 말씀이 아니라 지겹고 지루하게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행복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성령께서 영적 분별력을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의 고백이 있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따르는 거룩한 삶이 있었으면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고, 미혹의 영에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니라 진리의 영에 지배를 받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오직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민감한 분별력이 우리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