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짐을 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6:1-5 예화) 고 김선웅군의 짐나누기 2018년 10월 3일에 제주에서 새벽길 손수레를 끌던 할머니를 돕던 중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뒤 7명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세상을 떠난 고(故) 김선웅(19)군이 있습니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새벽 귀갓길에 제주시 종합청사 인근에서 무거운 손수레를 끌고 오르막길을 오르던 할머니를 발견하고 주저 없이 도왔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다 과속 차량에 치었으며 머리를 심하게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뇌사 판정을 받았습니다. 유족은 평소 고인의 뜻에 따라 장기기증을 결정했습니다. 고인의 신장과 폐 등 장기는 모두 7명에게 전달돼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줬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고 김선웅군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무거운 질병을 앓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짐을 져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할머니의 무거운 짐을 도와준 것도, 장기를 기증한 것도 모두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짐을 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갈라디아 6장 1절에서 5절을 묵상하며 ‘사랑은 짐을 지는 것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두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두 사람을 언급합니다. 이어서 두 가지 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깊은 관련성이 있습니다. 첫째, 두 사람은 누구입니까? 1절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범죄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입니다. 첫째로, 범죄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범죄한 사람이 있으며, 그가 범한 죄가 드러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갈라디아 5장 19절과 20절은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라고 합니다. 그들의 육체의 소욕을 따르며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며,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입니다. 둘째, 신령한 사람입니다. 범죄한 사람만 아니라 신령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갈라디아 5장 22절에서 24절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고 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육체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영에 속한 자들이며,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그들을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1절은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라고 합니다. 바로잡는다는 것은‘καταρτίζω’(카타르티조)로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부러진 뼈를 맞추거나, 찢어진 그물을 수리하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도록 하는 일은 신령한 사람, 즉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며,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합니까?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합니다. 즉 온유한 마음으로 회복시켜야 합니다. 온유함은 예수님의 마음이며,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성령의 조명과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라 범죄한 사람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며 바르게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 필요한 것은 먼저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거룩한 영향력을 통해 거룩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절은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산에서 나는 거칠고 나쁜 돌일지라도, 그것을 숫돌로 쓰면 자기의 옥을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이라도 자기의 지덕을 닦는 데 도움이 됨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성도는 다른 사람의 죄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 영적인 교훈과 도전을 받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혹시 나의 눈에 그들의 눈에 있는 티보다 큰 들보가 있지 않은지? 그들과 같은 죄악을 범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항상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신령한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죄를 범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미성숙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신령한 성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신령한 성도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날카로운 비난과 비판을 하지만, 그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안고 아파하는 성도들은 매우 적습니다. 우리 교회에 신령한 성도들이 많아 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이 신령한 성도들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자들이 회개하고 회복되며, 온전케 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두 가지 짐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신령한 자들의 삶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져야 하는 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2절과 5절에 있는 ‘짐’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짐은 원어로 서로 다른 단어가 사용되어 있습니다. 그 짐은 무엇입니까? 첫째, 서로 져주어야 하는 짐입니다. 2절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합니다. 2절에서 나오는 ‘짐’은 ‘βάρος’(바로스)로 혼자서는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말합니다. 우리는 많은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짐이 너무 무거워 휘청거릴 때도 있으며,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그 짐을 나누어 질수 있다면, 대신 져 줄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그 짐을 져 주실 분이 계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거운 짐을 가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 짐을 갖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 짐 대신 안식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짐을 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영적인 짐을 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에 우리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짐을 맡기고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짐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나누어지지 않는 것은 사랑의 법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에게 더 많은 짐을 지게 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짐을 져주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3절은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고 합니다. 이는 남의 짐을 지려는 사람은 남의 연약과 실패와 죄악을 이해하고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판단하고 정죄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짐을 지고 휘청거리거나 넘어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연약하지 않으며,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령한 성도는 서로 짐을 나누어지며, 서로를 세우며, 서로를 위해 헌신합니다. 혹시 인생의 짐을 지고 힘들어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교회 일을 하면서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들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의 일에 함께 동참하며, 짐을 나누어진다면 힘을 내어 기쁘게 더 헌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더 행복한 교회, 더 주를 위해 헌신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각자가 져야 하는 짐입니다. 4절과 5절은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고 합니다. 5절의 짐은 ‘φορτίον’(포로티온)으로 혼자가 감당할 수 있는 짐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반드시 책임을 갖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 져 줄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자신만이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 살피면 자랑할 일이 자신에게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책임감을 갖고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맡긴 직분과 사역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고 헌신하고 있습니까? 혹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성도들에게 맡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책임한 것은 게으른 것이며, 게으른 것은 악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과 2절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 합니다. 신령한 성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과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충성이며 헌신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있는 짐은 무엇입니까? 또한 주변에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 짐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최선을 다해 책임감을 갖고 지고 있습니까? 그 짐을 나누어지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짐이 있습니다. 내가 책임을 지고 감당해야 할 짐도 있으며, 함께 나누어 져야할 짐도 있습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면 함께 나누어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짐이라면 최선을 다해 책임을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짐을 통해 사랑을 나누며, 헌신의 열매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교회에서 맡긴 직분과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들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져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십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짐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면 짐을 집니다. 짐을 지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