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9:1-10 예화) 예배와 전도의 변화 코로라 19로 인해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을 하는데 있어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위축되고 중단된 것은 예배와 전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코로나 19 이후의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신앙생활에 대한 새로운 전환에 관심을 갖고 거룩한 변화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6월 달을 회복의 달로 정하고 회복을 소망하며 기도하며 수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을 경험하는 은혜를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여리고에 살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해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며 우리의 전도가 회복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그곳은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는 사해 북쪽 연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요단강 사이에 위치했으며, 예루살렘 동북동쪽으로 28km, 요단강 서쪽으로 11km 지점입니다. 구약성경에서의 여리고는 모세가 죽기 전에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바라 본 곳입니다(신 34:1-3).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내었고 기생과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 준 곳입니다(수 2:1-3; 수 6:25).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정복한 첫 성입니다(수 6:20; 수 6:21). 가나안 정복 후에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되었습니다(수 18:12; 수 18:21). 신약성경에서 여리고는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언급되었는데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눅 10:30). 예수님께서 소경이었던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곳입니다(마 20:29-31, 눅 18:35). 그리고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만나 구원하신 곳입니다(눅 18:1-10) 예수님은 어떻게 여리고에 들어가게 되셨습니까? ‘1절은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려고 하셨습니다. 이는 여리고를 일부러 방문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을 가시기 위해 그냥 통하시려는 곳이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도 아셨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초청하시고 구원하신 것을 보면 단순히 예루살렘에 가시는 길에 잠시 들르신 것이 아니셨습니다. 여리고에서 삭개오를 만나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구원하시기 위해 거룩한 걸음과 수고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역시 예수님의 거룩한 걸음과 수고와 희생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수고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도 복음을 전함으로 영혼을 구워하시는 일에 거룩한 수고와 헌신이 있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전한’ 또는 ‘의로운’ 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마 부모님이 그를 낳고 이름을 지으면서 순전하고 의로운 자로 성장하고 살아갈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자신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또한 여러분이 받은 직분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받은 직분에 합당한 헌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삭개오에 대한 사람들과 예수님의 시선이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태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합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첫째, 세리장으로 부자였습니다. 2절은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고 합니다. 그 당시 여리고는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들어오는 향유를 각 지역으로 보내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지역에서 세관의 책임자로 있었습니다. 세리는 로마에 의해 임명을 받았으며, 일정의 세금을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가져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능력과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많은 세금을 거두어 부를 축척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착취를 하고 있었기에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또는 흡혈귀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세금을 거두어드리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세리장이 되었으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창기와 더불어 죄인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성공과 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3절은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라고 합니다. 2019년 통계에서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키는 162.3Cm이며 남성의 평균키는 174.9Cm라고 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 남성의 평균키는 150Cm였다고 합니다. 그가 기형적으로 키가 작은 난쟁이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지만 사람들에게 가려 보지 못함으로 앞으로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본문에서 삭개오를 언급하면서 세리장이요 부자이며 카가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긍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신체적인 이유로 인해 멸시와 조롱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이것이 삭개오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으며 그를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삭개오를 어떤 사람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자신을 바라보는 삭개오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매우 다정한 음성으로 그를 향해 “삭개오야! 빨리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무르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소문난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삭개오는 주님 앞에 일어서서 “선생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세금을 누구에게 더 부과한 것이 발견되면 제 돈으로 네 배를 갚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 받은 삭개오에게 놀라운 회개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구원 그 이후의 삶은 거룩과 변화입니다. 우리에게도 그 변화와 거룩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9절과 10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집이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잃어버렸던 아브라함의 자손 중의 하나이다. 나는 이와 같은 이들을 찾아서 구원하러 왔다.”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삭개오 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삭개오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구원을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로마의 앞잡이로 동족 유대인을 착취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동족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삭개오를 보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의 직업과 행위와 신체만을 보고 죄인으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이런 것은 여리고 사람들만의 모습은 아닙니다. 우리도 자기 나름의 생각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복음을 전할 사람을 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저런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을 전할 마음을 갖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비난하고 정죄하기도 합니다. 혹시 여러분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런 사람이기에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해 이 사람도 아브라함이 자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잃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은 것을 찾는 것을 비유하셨습니다. 그것은 목자가 백 마리 양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것입니다. 여인이 열 드라크마 중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 비유를 통해 한 영혼의 소중함과 가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이 그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들, 즉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찾아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생명까지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사명은 예수님과 바울의 사명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헌신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전도를 사명으로 아는 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떤 사람도 구원 받아야 하며,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긍휼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거룩한 수고와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한 영혼의 사랑과 전도의 열정이 회복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삭개오와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찾아야 하는 하나님의 잃은 자는 누구입니까? 그들을 찾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