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1:1-4 예화) 소년의 헌신 필라델피아에 존이라는 13세의 소년이 있었습니다. 벽돌공장에서 노동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런 존의 마음을 슬프고 안타깝게 하는 것은 교회로 들어가는 길이였습니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진창길이 되어 몹시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불평을 하지만 해결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길 같았으면 벌써 벽돌이나 돌로 포장을 했을 것입니다. 존은 교회로 들어가는 길을 포장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이미 존의 눈에는 벽돌로 포장된 길과 그리로 들어가는 많은 아이와 어른들이 보였습니다. 존은 7센트의 임금 속에서 날마다 벽돌을 한 장씩 자기 공장에서 사서 깔기 시작했습니다. 그 길고 넓은 길을 존 혼자서 완성하려면 2년이 걸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1개월 안에 일어났습니다. 존 모습을 보고 이기적이며 형식적이었던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회복한 교인들은 길뿐이 아니라 낡은 교회당을 헐고 신축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 소년의 이름이 존 워너메이커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되었고 미국과 전 세계에 YMCA 건물을 수없이 지어주었습니다. 서울 종로 2가에 있던 YMCA 건물도 워너메이커가 기증한 벽돌로 지었습니다. 가난한 한 소년의 헌신은 성도들의 열정에 불을 집혔습니다. 전염병처럼 번져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헌신의 열정이 식었던 사람들이 뜨거워졌습니다. 헌신의 자리를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의 헌신이 회복되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 소년의 헌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만들었던 여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은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을 감동하게 만들었던 여인의 헌신을 통해 우리의 헌신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헌신이 회복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헌신의 열정이 식었던 성도들의 열절이 뜨거워지고, 헌신의 자리를 떠났던 성도들이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면서 부자들과 사람들이 넣은 헌금을 보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나팔 모양으로 된 아홉 개의 헌금함이 놓여 있었습니다. 성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목적에 따라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당시에 제사장들은 헌금을 드리는 액수와 목적을 확인했습니다. 그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렙돈은 당시 그리스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로 청동으로 만들어진 동전이었습니다. 두 렙돈은 얼마입니까?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입니다. 한 고드란트는 네 앗사리온이며, 십육 앗사리온은 한 데라리온입니다. 한 데라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두 렙돈은 하루 품삯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루 임금을 10,000원으로 잡았을 때 두 렙돈은 약 1,600원 정도 되었습니다. 500원짜리 세 개 정도를 헌금함에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자들보다 가난한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의 헌금을 더 많은 넣은 것으로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여인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있었습니까? 그는 매우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 당시 과부로 살아가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인데 가난하기까지 했습니다. 무엇이 그 여인으로 하여금 살아가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가난해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가난한 과부도 예수님께 칭찬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감동하신 것은 돈에 있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드린 헌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인이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많은 것 중에 일부를 드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없는 중에 모두 드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생활비 전부를 드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여인의 이런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고 무모한 행위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주는 헌신에 대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헌신은 무엇입니까? 첫째, 최선을 다한 헌신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습니다. 이는 최선을 다한 헌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화) 탄자니아 마라토너 ‘아쿠와리’ 1968년에 멕시코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많은 마라토너들이 출발신호가 울리자 힘차게 뛰쳐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선수가 옆 사람과 부딪치면서 길 위에 나뒹굴었습니다. 대기 중이던 의사들은 이 상태로는 뛰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나라 아프리카 탄자니아 출신의 마라토너 아쿠와리였습니다. 삐쩍 마른 몸에 휑하니 들어간 커다란 눈에는 절망과 슬픔의 눈물이 글썽였습니다. 그 때 앞서 나간 선수들을 망연자실 바라보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발짝 뛰고 넘어지고 두 발짝 뛰고 고꾸라지고 세 발짝 뛰고 나동그라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가 메인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관중들은 떠났으며 경기장에는 희미한 불 빛 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습니다. 모두가 그가 단념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이 달려와 담요를 덮어주고 안아 일으켰을 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를 향해 기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부상을 당하고도 왜 포기하지 않고 뛰었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조국이 나를 멕시코에 보낸 것은 단지 경주를 출발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완주하라고 보낸 것입니다.”(My country did not send me to Mexico City to start the race. They sent me to finish.”) 이것이 최선을 다한 사람의 모습이며 고백입니다. 최상의 상황과 환경에서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최악의 상황과 환경에서도 헌신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난한 과부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헌신을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은 어떻습니까? 도저히 헌신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건강도 재정도 시간도 마음도 헌신할 수 없는 상태는 아닙니까? 그래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헌신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헌신을 위한 최선의 수고를 다해야 합니다. 진정한 헌신은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는 거룩한 수고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믿음으로 하는 헌신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서 주목할 것은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일의 삶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루 분의 양식만을 거둘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만약 안식일이 아닌 날에 이틀 치를 거두면 모두 먹을 수 없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하루 이상의 만나를 거두었다가 모두 먹지 못한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마 욕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난 핵심은 내일도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내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염려와 걱정을 버리고 순종하며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하시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도와 삶의 우선순위를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30절과 31절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있으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입히시며 먹이시고 마실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는 어떠합니까? 마태복음 6장 33절과 34절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고 합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게 합니다. 내일 일을 오늘 염려하지 않고 내일 하게 합니다. 그 날의 괴로움을 그 날만 하는 것이면 충분하게 합니다.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은 내일을 염려하지 않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내일도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어려운 상황과 환경 가운데서 헌신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이 계속해서 헌신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가 헌신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를 염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는 사치스런 것이라고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헌신은 시간과 재물의 여유가 있으며,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사는 사람들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헌신은 믿음이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헌신은 시간이나 재물이나 건강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드릴 수 있었던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염려하고 걱정하지 않고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서 보신 것은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헌금에 대한 것이 아니라 헌신에 대한 태도와 신앙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과부보다 더 많은 헌금을 드렸을 것입니다. 아마 더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헌금함에 넣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는 최선을 다해 헌신했습니다. 믿음으로 헌신했습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만 헌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의 헌신, 은사의 헌신, 수고의 헌신, 기도의 헌신 등 많은 헌신이 있습니다. 때로는 성도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차량을 운행하고, 청소를 하고, 교사를 하고, 찬양대원을 하는 것도 헌신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 것을 원하십니까?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환경과 상황이 헌신하기에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헌신했으면 합니다. 믿음으로 헌신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헌신함으로 예수님을 감동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