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25-37 예화) 정죄하는 마음이냐? 사랑하는 마음이냐? 어느 교회에 한 목사가 파송되었습니다. 목사는 부임하는 주간부터 시작하여 매 주일 같은 거의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 내용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여러분, 이렇게 살면 장차 지옥에 가게 됩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인들은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그 목사는 메시지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거의 문 닫게 될 지경에 교회는 감독에게 새로운 목사를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감독은 다른 목사를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도 부임하는 주일부터 주일마다 거의 똑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면 장차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흩어졌던 교인들이 다시 모여들고 믿지 않던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는 크게 성장했고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감독이 교회를 방문하여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두 목사님이 동일한 내용의 설교를 했는데, 왜 먼저 목사님 때는 교회가 문 닫을 지경이 되더니, 지금은 이렇게 성장하는 겁니까?” 교회의 장로님이 대답을 했습니다. “먼저 목사님은 정죄하는 마음으로 그 설교를 했고, 지금 목사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설교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차이는 그것뿐입니다.” 사랑과 정죄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본문은 율법 교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질문과 대답을 통해 사랑에 대해 권면을 하셨습니다. 사랑은 성경의 핵심적인 단어일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에 있어나는 모든 문제는 사랑의 부재와 왜곡과 변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복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과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이 회복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율법 교사와 예수님께 사이에 어떤 질문과 대답이 있었습니까? 첫째, 영생에 대한 것입니다. 25절은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정말 알고 싶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자신의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면 비난하고 정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좋지 않은 의도를 갖고 질문과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선한 의도를 갖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26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고 하셨습니다. 율법 교사는 모세의 율법에 가장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그를 향해 네가 잘 알고 있는 율법에서 무엇이라고 하는지 오히려 반문하신 것입니다. 율법 교사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27절은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율법 교사는 자신 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정확하게 읽고 기억하고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를 향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28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라고 합니다. 율법 교사는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는데, 예수님은 영생을 얻은 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생을 주셨습니다. 영생을 얻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들의 합당한 삶입니다. 온 맘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웃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율법 교사는 더 자신 있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29절은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 질문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자신을 옳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즉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이웃을 사랑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신앙적인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 교사가 생각한 이웃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자신과 같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자기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유익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대하기에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진정한 이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교훈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강도 만난 자를 구해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로 보기도 하며, 반면에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비유된 아니면 사건이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돈을 빼앗고는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어 길에다 버려두고 달아났습니다. 마침 한 유대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피해서 다른 길로 지나갔습니다. 또 한 레위 사람 역시 지나가다가 그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피해서 그대로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에게 멸시를 받는 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 곁에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가서 밤을 새워 그를 간호하여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잘 돌보아주라고 부탁을 하면서, 만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첫째, 사랑은 긍휼입니다. 33절은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라고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강도들이 많이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만약 그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긍휼이 없었다면 그런 길을 혼자 가는 것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강도 만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지나쳤을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로 처지나 환경이 어려워 애처롭게 생각하는 마음이나 태도입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특히 긍휼은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음에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줄 아무런 관계나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강도 만난 것을 책망하거나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5장 32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고 합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에 굶겨서 집에 돌려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불쌍히 여기며 긍휼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불쌍히 여기는 것이며 긍휼히 여기는 것인 줄 믿습니다. 둘째, 사랑은 희생입니다. 34절은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고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 사람의 깊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상처를 싸매 주었습니다. 자신이 타고 가던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 아파하고 신음하고 사람의 곁에서 밤을 새워 돌보아 주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부은 기름과 포도주는 누구 것이었습니까? 그를 태워 간 짐승은 누구 것이었습니까? 그 기름과 포도주는 사마리아 사람이 먹고 마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 짐승은 사마리아 사람이 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름과 포도주를 부은 것입니다. 자기 짐승에 태웠습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고 합니다. 그리스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희생은 내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희생은 내가 죽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사랑은 희생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사랑은 책임입니다. 35절은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라고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여관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었습니다. 데나리온은 그 당시 은으로 만들어진 로마 시대의 기본 화폐로서 1데나리온은 당시 일반 노동자가 받는 하루 임금에 해당했습니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 특히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던 유대인을 위해 이틀 치 품값을 지불했을 뿐만 아니라 더 들면 비용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있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팔고 부인하도 떠날 제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시는 마지막 만찬을 하셨으며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사랑은 끝까지 책임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회복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어떤 권면을 하십니까? 37절은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를 향해 누가 진정한 이웃인지 물으셨습니다. 그가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을 통해 무엇이 사랑인지 아는데 만족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에 머무르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행함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생각과 마음과 몸과 시간과 재물과 수고가 요구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온 맘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긍휼과 희생과 책임을 지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사랑,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했던 그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이 회복되는 곳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신앙과 삶의 회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진정한 사랑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