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14-21 예화) 삼중종교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독자유통일당 비례 대표 1번 후보가 되었다가 취소를 당하고 탈당을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취소를 당하게 된 것은 기독교를 표방하는 당에 있으면서 종교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1980년에 세례를 받았으며 1982년에 집사가 됐다고 합니다. 2019년 7월에는 천주교 서울 대교구 도곡동 성당에서 엘리자벳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전에는 국회 내 불자 모임인 정각회 활동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번 반드시 새벽 예불에 참석하고 있다’ 는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중국적이나 이중당적은 보았는데, 삼중종교는 처음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생활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직분을 받았는데, 새벽 예불에 나가고 국회 불자 모임에 참석한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신앙생활은 인간의 필요나 인간의 방법으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열심이나 수고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와 충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 승천하신 후 열흘 만에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경험한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개혁파에서는 그 날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며 초대 교회의 설립일로 기념하기도 합니다. 그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사모하고 기대하며 베드로의 생애와 관련하여 말씀의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가운데 제 3위이십니다. 신약 성경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 보혜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구원하신 일은 하나님의 큰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예수님께서 성취하시고 성령께서 적용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사람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구원의 날까지 인 치심으로 보호를 받게 하십니다. 이것을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을 구원하는데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구원 받은 자들을 신앙과 생활에 있어 거룩한 변화를 일으키실 뿐만 아니라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이에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의 지배와 통제 가운데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생애와 변화에 있어 성령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지 않았을 때에는 예수님을 3년 이상 따라다니며 훈련을 받았던 제자인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예전의 형편없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만남과 부르심을 통해 구원과 사명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 능력을 받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만 우리의 신앙과 생애에도 예수님과의 만남과 성령 충만은 위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변화를 계속해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령 충만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기 전의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첫째, 시험에 들어 넘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해 깨어 기도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마음은 있었지만 육체의 연약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을 잤으며 시험에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한 베드로는 육체의 연약함과 피로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시험에 들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4절은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고 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이 주를 부인하고 떠날지라도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예수님이 잡히시자 멀찍이 따라갔으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한 베드로는 위기와 위험에 처하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셋째, 분노를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0절은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고 합니다. 가롯 유다가 군병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는 칼로 말고의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한 베드로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격한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넷째, 사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은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을 만류하며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은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다섯째,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은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이 되었을 때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고 모여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한 베드로는 사람을 두려워 숨었습니다. 혹시 이런 베드로의 모습이 여러분 자신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육신의 연약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시험에 들어 넘어집니다. 예수님을 대적하고 우리의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주를 시인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감정이나 분노를 절제하고 통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거룩한 변화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경험했던 성령 충만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찬송하며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경험할 때 베드로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첫째, 복음을 전했습니다. 14절은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고 합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사도들과 함께 서서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들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은 무엇입니까? 21절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고 합니다.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 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을 유업으로 얻는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해야 영혼 구원에 대한 거룩한 열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과 14절은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다가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에게 금과 은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걷게 했습니다. 그로인해 사람들 사이에 놀람과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사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배움이나 출신을 뛰어 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9절과 20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라고 합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논란은 오히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에게 부활이 없다고 하는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베로드와 요한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베드로를 심문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했습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해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넷째, 마귀를 대적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9절은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고 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았을 때 베드로는 악한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한 고난을 두려워하고 멀리했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 베드로는 마귀를 대적했습니다. 고난을 당하지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할 때 예수님과 복음을 위한 고난을 영광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악한 마귀를 이기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령 충만하기 전의 베드로와 같은 신앙과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까? 거룩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고난을 당하면 힘없이 주저앉지 않습니까? 악한 마귀와 시험을 이기지 못하지 않습니까? 온전히 충성하고 헌신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의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누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성령 충만은 사모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가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자가 받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성령 충만의 은혜가 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