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들보를 빼야 합니다 누가복음 6:39-49 도입) 한국 교회 예배 회복의 날 현재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단체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총연합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소속된 합동측은 전광훈목사가 회장으로 있는 한기총이 아니라 한교총에 가입이 되어 있습니다. 그 한교총에서 코로나 19로 인해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던 예배를 이제 적절한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현장예배로 복귀하는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날’을 발표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주보 칼럼을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코로라 19로 인해 신앙생활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변화는 예배에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염려하는 것은 코로나 19 후에 현장예배에 대한 적당한 타협과 대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에 대한 편리함과 안일함에 빠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데 작은 어려움만 있어도 참석하지 않거나 집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멈추었던 차가 출발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예전의 예배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아니 더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더 많은 결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 번 더 예배하고, 한 번 더 기도하는데 힘을 내었으면 합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근본이며 중심입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신앙과 삶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예배가 온전히 세워지며 신앙과 삶이 회복되고 더 견고해 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인간적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선을 행하며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랑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 같지만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온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식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헬라어로 외식은 ὑποκριτής(휘포크리테스)입니다. 이 단어는 극장이나 연극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위선자, 연기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니지만 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연기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준엄한 책망을 받은 사람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였습니까? 마태복음 23장 27절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이며, 바리새인은 경건주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정통했으며 율법을 따라 경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죄인과 세리와 창기들을 멸시하고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행위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지만 율법대로 살지 않았으며, 유대 지도자들이었지만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외식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외식은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구제할 때는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회당과 길모퉁이에 서서 큰 소리로 했습니다. 금식할 때에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을 하고 초췌한 얼굴을 했습니다(마 6:2, 5, 16). 그러므로 그들은 이미 상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상이 없었습니다. 외식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사랑을 칭찬을 위해 하는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여기시고 보시는가? 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와 목적에 주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외식한 자들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며, 힘들게 얻은 교인을 자신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든다고 하셨습니다(마 23:13, 15). 외식하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선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악한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인정하시게 합당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선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자신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유를 통해 교훈을 하셨습니다. 그 비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맹인과 선생입니다. 39절과 40절은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고 합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려고 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제자는 선생보다 아는 것이 많지 않을 수 있지만 열심히 배우는 자는 선생과 같아 질 수 있습니다. 이는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하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는 항상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온전한 성도는 가르치려 하기 보다는 배우려고 합니다. 가르치려는 교만이 아니라 배우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티와 들보입니다. 41절과 42절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고 합니다. 외식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큰 들보는 깨닫지 못합니다. 이는 자신은 많은 악함과 약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도 다른 사람의 악함과 약함을 비난하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사람에게는 교만과 독선이라는 들보가 있습니다. 이에 자신들의 허물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펴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자가 진실한 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악함과 약함을 보기 전에 우리에게 있는 악함과 약함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외식적인 자는 다른 사람의 흠과 티를 들추어냄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우월함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흠과 티를 감추어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며 용서와 용납을 통해 탁월한 자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의 티를 보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들보를 보고 더 겸손하며 섬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열매와 나무입니다. 43절에서 45절은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고 합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 맺는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게 됩니다. 무화과는 가시나무에서 나지 않고 포도를 가시덤불에서 딸 수 없습니다. 이는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동을 하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이 속에 있어서 악한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이 입으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식적인 신앙생활에는 선한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살아야 합니다. 선한 열매를 맺고 선한 영향을 끼치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의 핵심은 무엇에 있다고 하십니까? 46절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여 주여 부르면서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반드시 순종해야 하며, 순종할 수 있습니다. 외식하는 사람은 불순종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죄책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외식적인 신앙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48절과 49절은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고 합니다. 외식적인 자는 기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 집은 폭우가 덮치면 즉시 무너져 폭삭 주저앉습니다. 여기에 외식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식적인 신앙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외식적인 신앙생활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기초를 다지지 않고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견고한 것 같지만 악한 마귀의 미혹과 유혹의 욕심에 힘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고난과 환난을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흔들립니다. 왜냐하면 외시적인 사람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 중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에 따라 신앙과 헌신이 영향을 받습니다. 환경이나 상황이 변하면 신안생활도 변합니다. 반면에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은 환경이나 상황이 변해도 신앙으로 극복하고 오히려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더 견고하고 온전한 신앙을 세우는 기회로 만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외식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르치기보다는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티를 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어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그런 신앙생활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데 만족하지 말고 순종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항상 보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진실하고 진정성 있는 신앙생활을 했으면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책망하신 외시적인 자가 아니라 칭찬하시고 인정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