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세우는 것을 생각하라(1) 유다서 1:17-21 예화) 무신론자 의사의 회심 2020년 3월 27일 이탈리아 코로나 19 확진자는 8만 6498명이며, 한 날 사망자는 1,000명에 가까운 사망자는 919명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의 한 병원의 38세의 의사 줄리안 어번이 쓴 글이 3월 23일에 국민일보에 실렸습니다. “2주 전까지만 해도 동료들과 나는 무신론자였습니다. 우리 의사들에겐 정상인 일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과학이 신의 존재를 배제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교회에 가시는 것을 비웃었습니다. 75세 목사가 입원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것을 읽어주었는지를 보고 우리를 감동시켰습니다. 우리 의사들은 모두 피곤하고, 낙담했으며,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소진되었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만, 우리는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있을 때 기도를 합니다. 비록 한때는 맹렬한 무신론자였지만, 이제는 우리가 병든 사람들을 돌볼 수 있도록 주님께 계속 도와달라고 함께 기도하면서 평화를 찾아 매일 함께 같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습니다. 75세의 이 목사는 죽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의 무가치함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내 마지막 숨을 이용하여 남을 돕고 싶습니다. 나는 동료들의 고통과 죽음으로 둘러 싸여 있는 동안 주님에게 돌아온 것이 행복합니다.” 75세의 목사는 코로나 19로 인해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치료하던 무신론자였던 의사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유신론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사람들의 무너진 신앙을 세우고 회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다서의 핵심 내용은 영적 전쟁과 영적 건축입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패하게 하며 허무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영적 건축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어떻게 무너진 신앙을 다시 세우고 회복하며, 더 견고하게 할 수 있는지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유다는 신앙을 세우기 위해 무엇을 권면합니까? 17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고 합니다. 유다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의 권면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권면해야 합니다. 그러면 연약한 믿음을 세우고 세워질 수 있습니다. 유다는 무엇을 권면합니까?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입니다. 유다서의 내용과 비슷한 것이 베드로후서입니다. 유다서는 베드로후서의 연장선에서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절과 2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고 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를 쓰는 목적을 진실한 마음을 깨워 다시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예언자들이 미리 예언한 말씀들과 주 되신 구주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한 말은 무엇입니까? 18절과 19절은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라고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3절과 4절은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라고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사도들은 말세가 되면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정욕대로 행하며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부인할 것입니다. 그들로 인해 교회는 갈등하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당을 지어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또한 성령이 없는 육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아니라 마귀의 영을 따라 행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도 무너지고 다른 사람만 아니라 교회를 무너지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와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세워야 합니까? 20절과 2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고 합니다. 유다는 영적 건축의 관점에서 믿음을 온전하게 세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믿음입니다. 20절은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라고 합니다. 건축을 하는데 있어 가장 기초가 되며 중요한 것은 기초공사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초공사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룩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 고백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과 6절은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미혹과 환난을 경험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귀와 세상의 시험과 공격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러면 어떤 미혹과 고난이 있어도 결코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초가 견고하지 않는 건물은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통해 온전한 신앙을 세워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20절은 ‘성령으로 기도하며’ 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지배와 감동과 인도하심에 따라 하는 기도입니다. 온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또한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육체의 정욕을 위해 구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야고보서 4장 2절과 3절은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얻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잘못 쓰려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기도는 신앙을 허물어지게 합니다. 반면에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따르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 기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더 친밀하게 세우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더 온전하게 세운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영적 침체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혔을 때 멀리서 따라가다가 부인을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가 아니라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회복시킨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에 걸친 질문을 받으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영적인 침체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우리의 믿음이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21절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신앙생활의 많은 미혹과 환난을 이기게 합니다. 사랑은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실패한 자를, 절망하고 있는 자를, 모든 것을 상실한 자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5장 9절과 10절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제자들을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것처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순종합니다. 또한 순종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말씀의 순종을 통해 믿음을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다는 믿음을 세우기 위한 결론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22절은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고 합니다. 그는 영생에 이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성도들의 기다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미혹과 환난을 당하지만 끝까지 믿음이 허물어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의 인내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흔들리고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회의에 빠지고, 구원의 확신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긍휼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인내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룩한 믿음 위에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키며 예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기대했으면 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우리의 신앙이 변질되거나 왜곡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는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둠이 깊으면 빛은 더 드러납니다. 거짓이 있으면 진리는 더 가치를 더합니다. 이런 시대에 더 순전하고 견고한 믿음을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연약한 사람들의 믿음을 세우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