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이랬습니다 에베소서 2:1-10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 와 ‘전에는’ 이라는 단어를 통해 구원 받기 이전의 영적 상태를 자세하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과거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 대한 거룩한 결단과 소망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구원 받기 이전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때 어떠했습니까? 첫째, 그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1절은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영적 상태를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인해 죽었습니까? 허물과 죄입니다. 허물은 파라토마(παράπτωμα) 로 정해진 길에서 이탈하는 탈선입니다. 죄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로 표적을 맞추지 못하고 벗어나거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를 구분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해석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함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음은 영생의 상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은 육체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창세기 3장 10절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은 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로서의 관계도 단절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며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깁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둘째, 그들의 영적 행실입니다. 2절과 3절은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고 합니다. 바울은 구원을 받기 전 그들의 행실을 주장하는 영적 배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로 세상과 마귀와 육체입니다. 그 때 그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들은 세상 풍조를 따라 행했습니다. 본문에서 세상은 타락한 피조물과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풍조는 세상의 추세나 시대의 경향에 따른 흐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풍조를 따른다는 것은 타락한 시대의 경향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삶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고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는 쾌락을 사랑하며 재물을 사랑하며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이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라 행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입니다. 이는 악한 마귀의 영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4절과 5절은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으니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들을 향해 그것을 먹지도 죽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아져서 선악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악한 마귀의 말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악한 마귀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악을 행하게 합니다. 그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습니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모두 했습니다. 본문에서 육체는 인간의 살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욕심은 악한 본성을 추구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모두 했다는 것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것을 절제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자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일을 한다고 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육체의 일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 5장 19절에서 21절은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라고 합니다. 육체의 일은 네 가지 측면에서 범하는 죄악입니다. 윤리적인 것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입니다. 신앙적인 것은 우상숭배와 주술과 이단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것은 원수 맺음과 분쟁과 시기와 분노와 당 짓는 것과 분열과 투기입니다. 무절제한 것은 술 취함과 방탕함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구원 받기 전 그 때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으며 악한 마귀의 영의 유혹으로 인해 육체의 세상의 풍조와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행실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잃고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첫째,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4절과 5절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었으며 마귀와 육체의 종으로 살던 자들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은 자들을 그리스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구원은 생명과 구출과 회복과 치유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영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위기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상황과 환경이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에서 치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은혜를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에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죄와 허물이 있는 곳에 사망과 단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 생명과 회복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사망과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자였는데, 은혜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고 천국을 유업으로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습니다. 둘째, 믿음으로 구원하셨습니다. 8절과 9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고 합니다. 8절에서 우리는 복음의 세 가지 근본적인 단어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은혜와 믿음과 구원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영원한 사망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로 인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두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으며 조건을 갖춘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갈라디아 2장 16절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고 합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 즉 구원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은혜인 것은 믿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에 우리 자신을 자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은혜와 믿음을 주심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을 자랑하며 감사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6절과 7절은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하늘 위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곁에 우리를 앉혀 주셨습니다. 또한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 이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행하며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10절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재창조이며 새 창조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의 영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미 오래 전부터 선한 일을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선하게 되도록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자로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시장에 팔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값싼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품으로서의 품위와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때의 상태로, 그 때의 행실로 두셨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요? 우리는 여전히 죄와 허물로 죽은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악한 마귀의 유혹을 따라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은혜의 복음을 전하며 선한 일을 하는 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새 생명을 얻은 새 사람으로, 하나님의 작품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