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지체로 살아가기 에베소서 4:25-32 예화) 한국교회, 코로나 이후 과제는 지난 7월 6일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면에 한국성결신문의 의뢰로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서 실시한 ‘코로나 이후 신앙 인식’ 에 대한 온라인 설문 조사 결과가 났습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 목회자와 성도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직면할 어려움은 ‘성도 간 교제 및 공동체성 악화’(32.3%) ‘모이는 예배 감소(주일성수 악화)’(29.9%) ‘교회 신뢰도 하락’(15.5%) ‘전도 및 새신자 유입 악화’(14.9%) ‘대면 교육과 훈련 악화’(3.8%) ‘헌금 감소’(3.1%) 순으로 나왔습니다. 명지대 주상락 교수는 “한국교회는 코로나 시대에 비대면예배와 제한된 모임으로 교회의 공동체성 약화를 경험했다”며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기독교 공동체의 영적 자산인 환대와 섬김, 코이노니아(교제)를 통해 진정한 공동체적 교회론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 즉 몸의 지체에 대해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그 새 사람은 새로운 공동체, 교회의 구성원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30절은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고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들은 그 몸의 지체라고 합니다. 지체는 헬라어 μέλος(멜로우)로 영어는 ‘members’ 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지체는 몸을 구성하는 발과 팔과 눈과 귀와 입을 비롯한 각 부분을 말합니다. 몸의 지체는 강한 것도 연약한 것도 있습니다. 큰 것도 작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각 지체는 모두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각 지체로서 성도들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중요한 존재들이기에 소중하여 여기며 함께 지체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교회의 지체로서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첫째,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25절과 29절은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고 합니다. 바울은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해야 할 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끼치는 말과 은혜를 끼치지 못하는 말입니다. 은혜가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까? 은혜가 충만한 교회를 세우고 싶습니까? 그러면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은혜를 끼치지 못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거짓말과 부끄러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들어가셨을 때 한 여인이 삼백 데나리온이 되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그때 가롯 유다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요한복음 12장 5절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고 합니다. 가롯 유다는 삼백 데나리온이 되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재정을 맡고 있어 그 돈을 훔쳐 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듣기에 가롯 유다의 말은 매우 좋은 말이었습니다. 옳은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과 다른 사람과 자신을 속이는 말이었습니다. 거짓말을 하던 가롯 유다는 결국 자신의 야망과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고 비참하게 생을 마쳤습니다. 부끄러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거짓말이나 악한 말은 자신의 욕심이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속이고 유익을 얻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은혜를 끼치는 말은 무엇입니까? 진실한 말입니다. 덕을 세우는 말입니다. 선한 말입니다. 우리는 말을 가려서 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듣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말은 좀 더 충분히 생각하고 예의를 갖추어서 해야 합니다. 악한 말은 입밖에도 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말, 기도 응답을 나누는 말, 말씀의 능력을 경험했던 말을 해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축복하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비난하고 비판하고 험담하고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은혜가 있는 말을 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로운 말을 하는 성도들로 인해 은혜로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분노로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처음으로 분노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형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가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4장 5절에서 6절은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고 합니다. 가인은 분노하며 안색이 변했습니다. 동생 아벨이 들에 있었을 때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안색이 변했으며 악을 행했습니다. 그는 분노로 인해 죄의 요구에 힘없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분노를 참지 못했기에 동생을 죽이는 살인의 죄를 범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은 분노를 참지 못한 가인이 범한 죄악이었습니다. 야고보는 분노에 대해 무엇을 권면합니까? 26절과 27절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고 합니다.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분을 낼 수 있는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노를 오래 품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틈을 타는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혹시 분노가 있지 않습니까? 그 분노가 스치고 지나가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을 오랫동안 품고 있으면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면서 극복해야 하는 것이 분노입니다. 왜냐하면 분노는 불평이 되고 미움이 되고 공격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분을 품고 있으면 교회 생활에 부정적이고 비협조적이 냉소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도 할 수 없고 응답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쁨도 즐거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단순히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과 20절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기 위해 듣기는 빨리하지만 말하기는 천천히 해야 합니다. 성을 내는 것도 천천히 해야 합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성을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분을 내므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마귀가 우리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분을 품을 오래 품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28절은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고 합니다. 도둑질은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는 것입니다. 바울은 도둑질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할 수 있게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재물을 훔치거나 빼앗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선한 목적을 갖고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성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재물을 얻고, 그 재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방법을 통해 돈을 벌고 악한 일에 쓰는 것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도둑질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것을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몸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 합니다. 둘째, 안식일입니다. 출애굽기 31장 13절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고 합니다. 셋째, 십일조입니다. 말라기 3장 8절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고 합니다. 우리의 생명도 시간도 재물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려야 합니다. 거룩한 주일을 예배하며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수고하여 얻는 재물의 십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온전한 헌신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몸을 드리며, 시간을 드리며 재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헌신입니다. 헌신은 내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믿음과 사랑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수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생명과 시간과 물질을 헌신할 수 있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지체로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0절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체로서 성도들은 구원의 날까지 성령 안에서 보호받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슬프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지체로서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악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31절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라고 합니다.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듬과 비방입니다. 그것을 모든 악한 생각과 의도와 함께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옛사람의 성품이며 생활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지체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며 다른 성도들과 함께 교회 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입니다. 둘째, 친밀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32절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고 합니다.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다른 지체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를 깨트리는 것은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듬과 비방입니다. 반면에 영적 친절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친절과 긍휼과 용서입니다. 우리는 서로 예의를 갖추어 대해야 합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대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자로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친절과 긍휼과 용서가 있는 성도들이 될 때 영적 친밀한 관계 안에서 함께 성장하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영적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세우고 섬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교회는 구원공동체며 예배공동체며 사랑공동체며 사명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들은 몸의 지체입니다. 교회 생활은 지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기 위해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합니다. 마귀가 틈타지 않게 분노를 해결해야 합니다. 선한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악한 것을 버리고 친절과 긍휼과 용서를 통해 영적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불편함과 분노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더 온전하게 세우는 교회의 지체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