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거룩성 에베소서 4:17-24 에베소서는 바울이 A.D. 62년경에 로마 옥중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에베소교회가 성경적이고 온전한 교회로 세워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역사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워야 할 교회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 교회는 구원공동체며 예배공동체며 사랑공동체며 사명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일치성과 다양성과 성장성과 거룩성을 갖고 있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될 것을, 각 지체됨을 다양함을 존중할 것을, 서로 섬기며 세우며 성장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로 존재하며 사명을 감당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거룩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거룩성은 결국, 성도들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하나 되면 교회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성장하면 교회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거룩하면 교회도 거룩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거룩성에 대해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성경에서 ‘거룩’ 은 매우 중요한 개념과 의미가 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거룩은 순수한 우리말로 ‘매우 성스럽고 위대하다’ 는 뜻이며, 한문으로는 ‘성결’(聖潔)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거룩을 구약에서는 카도쉬(קָדַשׁ)로, 신약에서는 하기아조(ἁγιάζω) 로 ‘구별하다, 분리하다, 경건하다’ 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속성으로서의 거룩성은 구별성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잃어버린 교회는 세상의 단체나 모임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탁월함과 능력은 거룩함에 있는 줄 믿습니다. 그 거룩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20절과 21절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라고 합니다. 바울은 거룩함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왜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할까요? 거룩한 자로 살아가지 못할까요?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교회가 세상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거룩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따르는 데 있습니다. 모든 비극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없었을 때에 어떠했습니까? 17절은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고 합니다. 예수님이 없었던 시기에는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했습니다. 그때는 허망한 마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이는 마음이 공허하고 허무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채워도 채워도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얻고 이루어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무엇을 채우거나 얻음으로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과 25절은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고 합니다. 인생은 풀과 같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인생은 영원하지 않으며 영광은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듣고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삶은 공허하고 허무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있는 삶은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마음이 허망한 인생을 사는 자가 아니라 의미와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자들의 영적 실상은 어떠했습니까? 첫째, 영적으로 무지했습니다. 18절은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라고 합니다. 그들은 총명을 잃어버려 분별력을 상실했습니다. 영적 무지와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무지함은 세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영적인 지식입니다. 영적 지식이 있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살지 않습니다. 영적 어둠과 무지함 가운데 있는 자는 어떠합니까? 로마서 1장 21절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라고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생각이 허망해졌고 마음은 어두워졌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머리로만 알기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는커녕 날마다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데도 감사조차 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죄악의 어두움 가운데 살게 만들었습니다. 영적 어두움은 영적 무지로, 영적 무지는 교만으로, 교만은 거룩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영적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영적 무지에서 깨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영적 분별력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영적으로 무감각했습니다. 19절은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라고 합니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한 자는 영적으로 무감각한 자가 됩니다. 또한 그들은 마음이 굳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났기에 무감각합니다.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죄를 범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이에 영적으로 무감각한 자들은 결국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게 됩니다. 방탕은 영적 어둠과 무지함 가운데 사는 사람의 특징적인 행위입니다. 로마서 13장 13절과 14절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고 합니다. 낮의 빛 가운데 사는 자는 단정히 행합니다. 반면에 어두움 가운데 사는 자는 방탕하고 술 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하며 다투며 시기합니다. 그들은 육체의 정욕에 이끌려 육신의 일을 계획하고 행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는 영적인 감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죄를 죄로 깨닫고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육체의 정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육체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을 계획하고 행합니다. 요즈음 여러분의 영적인 감각은 어떠합니까? 혹시 영적으로 무감각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까? 죄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여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영적인 정체나 침체를 발견하고 회복하고 있습니까? 개구리를 삶는 방법은 뜨거운 물에 바로 넣는 것이 아닙니다. 차가운 물에 넣고 끓여 감각을 마비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예배와 교제와 헌신의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하면서 많은 성도들의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며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각을 느낄 수 없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감각이 살아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복음을 듣고 가르침을 받은 자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들을 향해 영적 무지와 무감각한 자로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는 거룩한 자로 살아갈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무엇을 통해 걸구한 성도가 되어 거룩한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까? 첫째, 옛사람을 벗어야 합니다. 22절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라고 합니다. 옛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중생하기 이전의 자연인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믿지도 않았기에 주님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이기에 영적인 무지와 무감각한 사람들입니다. 이 옛사람을 벗어버릴 것을 권면합니다. 바울은 옷을 벗는 것을 통해 옛 사람의 생활을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벗어 버려야 할 옛 사람은 무엇입니까?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기 이전의 생활로 육체의 유혹의 욕심을 따라 행하던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8절과 9절은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라고 합니다. 옛 사람이 벗어야 할 것은 분노와 증오와 악의와 비방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말과 거짓말입니다. 그것을 버려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벗어 버려야 할 옛 사람의 행위가 있습니까? 그것을 벗어 버림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린 사람들로 인해 거룩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23절과 24절은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고 합니다. 바울은 옛 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새사람은 옛 사람과 대조되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새롭게 되어 영적인 지식과 감각이 회복되었습니다. 이에 빛의 자녀로 빛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새사람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으며,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과 16절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고 합니다.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드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에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처럼 우리도 행실이 거룩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거룩하게 살뿐만 아니라 거룩한 교회를 세워야 하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7장 16절과 17절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도 거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의 거룩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성도들과 교회의 거룩함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교회의 거룩성은 예수님의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한 성도가 되어 거룩한 교회를 세우는 것은 예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응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도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거룩한 성도가 되어 거룩한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