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진보를 이루라 요한복음 4:20-24 지난 3개월 동안 수요기도회 시간에 탐 알렌의 ‘평생 예수 믿어도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 라는 책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성장을 방애하는 것을 언급하며 믿음의 성장을 권면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영적 성장을 경험해야 하는데 침체 혹은 퇴보를 경험하는 성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에 2022년의 표어를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라’ 고 정하고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영적 진보를 이루려고 합니다. 진보는 무엇입니까?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지는 것입니다. 또는 변화나 발전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영적 진보가 일어나야 합니까?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헌신과 복음입니다. 더 나은 예배, 더나은 말씀, 더 나은 기도, 더 나은 헌신, 더 나은 복음을 위한 수고가 있었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어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일어난 예배의 진보에 대해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더 나은 예배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으면 합니다. 더 나은 예배를 드리기로 결단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예배의 진보로 인해 거룩한 변화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과 여인은 예배에 대해 어떤 대화를 했습니까? 첫째, 예배의 장소입니다. 20절과 21절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향해 예배의 장소에 관한 질문을 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들의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했는데, 유대인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배의 장소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 사마리아는 매우 중요한 도시입니다. 다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이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했습니다. 그 후에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방해하던 산발랏을 중심으로 사마리아에 근처에 있는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조상들이 이 산에서 예배했다는 것은 바로 그리심 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전을 말합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근처에 있는 시온 산에 세워진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예배해야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진정한 예배는 장소의 문제 일까요? 코로나 19의 팬데믹 상황에서 어디에서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논쟁이 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예배당에서 성도들이 모여 대면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어디에서 어떻게 예배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인의 예배에 대한 질문은 지금도 있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힘들었던 성도들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배 시간에 맞추어 가족들이 모두 예배당에서 예배할 때 가던 옷을 입고 단정히 앉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두 주 지나면서 시간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잠옷을 입고 예배하고, 단정히 앉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만 틀어 놓고 행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자 대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예배할 수 있는 환경이나 상황이 되었음에도 예배당을 찾아 예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예배하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간절함도 사라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자신을 생각하며 신앙의 정체성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예배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핵심은 아닙니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예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때로는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예배하는 거룩한 수고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배의 대상입니다. 22절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고 합니다. 이는 누구를 예배해야 하는가? 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제사, 혹은 예배가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의 차이는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에 있습니다. 심지어 존 맥아더는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배의 대상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는 종교의 차이만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도 예배의 대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대상은 철저히 하나님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유대인들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구원이 유대인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의 신들을 영입한 혼합주의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작은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만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사랑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출애굽기 20장 2절과 3절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가장 먼저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길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 창조주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구원자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만 경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배의 태도입니다. 23절과 24절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고 합니다. 이는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에 대한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의 태도와 자세입니다.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있지만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태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이에 어떻게 예배해야 합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영은 πνεῦμα로 ‘사람의 영혼, 혹은 성령’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리는 ἀλήθεια로 ‘진리의 말씀, 혹은 진실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 안에서 영으로 예배하며, 말씀 안에서 진실한 예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성령의 거룩한 임재와 강력한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며 진실한 마음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성령의 거룩한 임재와 감동하심 가운데 드리는 예배입니다. 말씀 안에서 온전한 마음과 헌신이 있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의 예배가 지극히 인간적이며 형식적일 수 있습니다. 말라기 1장 10절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고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제단에 헛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지도 받으시지도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예배자로 받으시지 않는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마음과 태도로 예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더 나은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배의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배를 중심으로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 번 더 드리는 예배, 더 나은 예배를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영적인 예배가 되었으면 합니다. 진실한 마음의 예배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영적인 성장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예배의 진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어난 예배의 진보가 준 영향은 무엇입니까? 첫째, 여인의 인생이 변했습니다. 여인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며 지금 살고 있는 남자는 자기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남자 여섯 명과 살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육체의 정욕에 이끌려 살던 음탕한 여인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살기 위해 여섯 남자와 살던 여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떤 여인으로 해석을 하든지 기구한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여인이 예배의 진보가 일어나지 어떻게 했습니까? 28절은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라고 합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여인의 행동에서 주목할 것은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버려두고’ 는 헬라어 ἀφίημι로 ‘보내버리다, 포기하다’ 는 뜻이 있습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간 것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예배의 진보는 여인의 인생에 거룩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여인은 지금 살고 있는 남자가 자기 남편이 아니었기에 원래 가정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던 남자와 살지 못하던 삶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예배가 주는 은혜는 한 사람의 인생에 위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떠날 것을 떠나고, 보낼 것을 보내고, 포기할 것을 포기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의 인생에 거룩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여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29절과 30절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고 합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와서 그리스도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배의 진보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회복되어야 할 것이 복음 전파의 사명입니다. 예배는 교회에서 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파송을 받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사명이 회복되었으면 합니다. 사명 감당한 능력을 받았으면 합니다. 복음을 선포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기초와 중심이 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신앙과 인생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배가 온전히 세워지면 신앙과 인생에 세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배의 회복이 있었으면 합니다. 예배의 진보가 일어났으면 합니다. 더 나은 예배를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거룩한 변화를 경험했으면 합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만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