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산할 때가 있습니다(1) 마태복음 25:24-30 예화) 내 인생 결산 보고서 그레고어 아이젠하우어는 독일의 철학자이며 추모기사 작가입니다. 그는 유명한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 시민의 삶을 주변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 추모하는 글을 썼습니다. 십여 년간 추모기사를 쓰면서 느낀 질문 열 가지를 ‘내 인생의 결산 보고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가장 짧은 대답’ 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1) 스스로 생각할 것인가? 남을 시킬 것인가? 2) 왜 사는가? 3) 나는 행복한가? 4) 나는 아름다운가? 5)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6) 무엇을 해야 하는가? 7) 누구를 위해 해야 하는가? 8) 신은 있는가? 9) 내 수호천사는 누구인가? 10) 죽어서도 살 수 있는가? 라고 합니다. 그것에 대한 핵심 질문은 1) 어떻게 죽을 것인가? 2)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3) 어떻게 살 것인가? 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를 결정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12월 31일과 1월 1일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루 사이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변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 하루는 별로 가치나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12월 31일과 1월 1일은 특별한 날이며 의미 있는 날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은 그날을 중간 점검과 중간 결산하는 날로 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단순히 한 해를 보내고 한 해를 예배하며 맞이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 예배를 드리며 우리의 신앙과 삶을 중간 점검하고 결산하는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오늘과 송구영신예배 시간에 달란트 비유를 ‘결산할 때가 있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 중간 점검하고 결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어떤 주인이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의 소유를 맡겼습니다. 그들에게 맡길 때 주인은 종들의 재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그 당싱 한 달란트는 지금의 화폐 가치로 약 6억원입니다. 그 주인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와 종들을 향해 결산을 요구했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배를 남겨 가지고 와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한 달란트 그대로 갖고 와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의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인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종은 누구입니까? 성도들입니다. 달란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능, 은사, 사역, 직분, 인생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결산하자고 하실 때 드려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19절은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라고 합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떠난 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종들을 향해 결산하자고 하는 것은 심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종말에 우리에게 결산하자고 하실 것입니다. 그 종말은 우리가 죽어 주님 앞에 설 때든지, 아니면 재림하실 때입니다. 즉 개인의 종말인 죽음과 우주적 종말인 재림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결산할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산할 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중간 점검입니다. 중간 결산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지금 결산하자고 하시면 어떤 종의 모습일 것 같습니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입니까? 아니면 한 달란트 받은 종입니까? 한 달란트 받은 종으로 주님 앞에 서지 않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살펴보며 책망이 아니 칭찬을 받는 종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달란트 받는 종은 어떻게 했습니까? 18절은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라고 합니다. 그 종은 달란트를 받고 가서 땅을 팠습니다. 그 땅에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가 다른 종처럼 달란트를 갖고 장사하여 이익을 내지 않고 땅에 감춘 이유가 무엇인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영적 상상력을 통해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책망이 아니라 칭찬을 받은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무엇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까? 첫째, 한 달란트 받은 종의 고백입니다. 24절과 25절은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라고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는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심지 않는 데서 거두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주인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한 달란트를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이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을 매우 포악하고 거칠고 악한 사람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매우 질이 나쁜 구두쇠나 돈을 모으는 데는 광적이면서 아주 인색하며 노동력을 착취해 소득을 얻는 파렴치한 인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에 대해 왜곡된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생각한 것처럼 주인이 악하고 파렴치한 분이었을 까요? 절대로 실수나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분이었을 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달란트 그대로 갖고 왔을 때 책망한 것을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안전하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연약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각 그 재능대로 주었다’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자는 때로는 실수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지만 최선을 다해 수고하고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혹시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자족하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며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최선을 다했으면 합니다. 안전하게 사는 것이 최상일까요? 실수나 실패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까요? 그것을 칭찬하실까요? 예수님은 실패하는 사람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오히려 책망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주인의 책망입니다. 26절과 27절은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라고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런 분이었다면 돈놀이를 잘하는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 원금과 이자를 받게 했을 것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은 많은 달란트를 남기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기대와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않아 땅에 묻어 둔 것입니다. 주인은 그런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게으른 사람이었습니다. 게으른 것은 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게으름은 일 처리나 행동이 느리고 싫어하는 성품이나 습관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22장 13절은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고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사자가 밖에 있어 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자는 밖에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어떤 이유와 핑계를 대서라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종으로서의 게으르기에 헌신에 대한 습관이 없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악한 습관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레미야 22장 21절은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안할 때 경고를 하셨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지 않는 것이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칭찬을 받은 종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악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종종 하나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간이 없고 재물이 없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건강이나 상황이나 환경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헌신을 위한 습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에 헌신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를 남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로 최선을 다하는 것에 있습니다. 바울은 부지런함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로마서 12장 11절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자가 아니라 선하고 부지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책망이 아니라 칭찬을 받는 종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등학교 때에 숙제장을 제출하면 선생님께서 도장을 찍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참 잘했어요’ 라는 도장을 받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그 도장을 받기 위해 더 성실하고 열심히 숙제를 해 갖고 갑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참 잘했어요’ 라는 도장을 받았으면 합니다. 그 도장을 받지 못하더라도 ‘더 노력하세요, 좋아지고 있어요’ 라는 도장을 받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비록 때로는 실수하고 실패해도 도전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믿고 최선을 다하기 원하십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니라 선하고 부지런한 종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제 2021년의 남은 한 주간을 중간 점검하고 결산함으로 최종 결산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결산할 때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종이 아니라 칭찬을 받는 종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