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1-4 예화) 그런 교회는 다니지 말게! 한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는 현재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것을 말하며 자신이 다닐 수 있는 좋은 교회를 소개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청년의 말을 다 들은 목사님은 그를 향해 ‘자네가 말하는 그런 교회는 이 세상에는 없다네. 혹시 그런 교회를 찾아도 자네는 다니지 말게. 그 좋은 교회가 자네로 인해 힘들어질 수 있으니까?’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좋은 교회를 세우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교회가 아니라고 불평합니다. 때로는 험담을 하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런데 좋은 교회가 자신으로 인해 힘들어지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은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러 교회에 자랑을 했던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해 함께 나누며 감사와 자랑이 있는 교회에 대한 거룩한 소망을 품었으면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중에 야손의 집에서 출발한 가정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핍박과 방해로 인해 데살로니가를 떠나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낼 첫 번째 편지를 써서 디모데에 주어 전달하게 했습니다. 그 후 약 3개월이 지난 후에 두 번째 펴지를 써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편지의 형식을 갖고 있기에 발신자와 수신자와 인사가 있습니다. 발신자와 수신자는 누구입니까? 1절은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발신자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바울이 기록했으며 실라와 디모데가 참여했을 것입니다. 실라는 바울이 바나바와 헤어지고 난 후에 선교에 참여한 동역자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믿음의 아들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바울은 매우 탁월한 전도자요 목회자였지만 혼자 모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으며 함께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며 섬기는 일은 우리 모두의 동역과 헌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방관하고 구경하는 자들이 아니라 함께 동역하고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신자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어머니라고 불리던 도시로 바울 당시에는 대략 12만 명의 인구가 있었으며 다수의 유대인과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 교회를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이 아리스다고와 세군도를 비롯한 유대교에서 회심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 주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라고 합니다. 이는 교회의 영적 정체성과 소속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에 세워졌지만,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적 가정이며 섬기는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행복한 영적 가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으로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무엇을 축복하고 있습니까? 2절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합니다. 바울은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도하며 축복했습니다. 은혜는 ‘χάρις’(카리스) 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 사건과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을 때 영생을 얻은 것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평강은 ‘εἰρήνη’(에이레네) 로 ‘평화, 혹은 안전’ 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생각과 마음과 환경과 삶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평강은 소유나 환경이 주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 평강이 있습니다. 은혜의 열매가 평강입니다. 그런데 은혜와 평강의 원천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있는 은혜와 평강이 충만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와 평강을 축복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3절과 4절은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고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여러 교회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랑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데살로니가 교회는 감사하고 자랑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를 자랑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교회를 부끄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그런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이 감사하고 자랑한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바울이 감사하고 자랑한 교회는 크고 웅장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첫째, 믿음이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은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고 합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소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을 넘어 각처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에 그 교회 성도들의 믿음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역사가 있었으며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울을 비롯한 사역자들이 격려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무엇을 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3장 10절은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보충하기 위해 얼굴 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완전한 것도 없습니다. 비록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에 있어 더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더 온전한 믿음을 추구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우리는 선줄 생각하다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혹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아직 공사 중에 있습니다. 아직 과정 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온전한 믿음을 위해, 믿음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거룩한 수고를 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현상이 있었습니까? 3a절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라고 합니다. 그들이 믿음이 더욱 자라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자라고’ 는 ‘휘페라욱사노’(ὑπεραυξάνω)로 현재진행형으로 계속해서 믿음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더욱 자라고’ 는 ‘엄청난 성장’ 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감사하고 자랑한 것은 그들이 믿음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믿음의 성장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견고한 신앙이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길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 믿음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더 온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랑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은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고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 거룩한 수고와 희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사모하고 목숨까지도 주기를 기뻐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바울을 사랑하고 바울도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사랑의 기쁜 소식을 바울에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항상 바울을 생각하고 간절히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 공동체입니다. 이에 하나님의 말씀과 목회자의 영적 지도에 따라 사랑 안에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화목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그 사랑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3절b는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과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먼저 하는 사랑이며 주는 사랑이며 희생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풍성했습니다. 이는 사랑이 흘러넘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계속해서 사랑이 샘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신기하게도 주면 줄수록 더 넘쳐납니다. 더 풍성해지고 더 충만해집니다. 마르지 않은 샘과 같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박해와 환난 중에 인내하는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과 7절은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환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받았습니다. 이에 복음을 위해 헌신하던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습니다. 그 결과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 있는 믿는 사람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바울을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종종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큰 위로와 힘과 용기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난 중에도 믿음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는 사람을 볼 때입니다. 그들이 환난을 겪을 때도 낙심하지 않고 예배하며 기도하며 헌신을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볼 때입니다. 반면에 작은 환난에도 흔들리며 믿음과 헌신을 자리를 떠나는 것을 보면 실망하고 낙심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므로 큰 용기와 격려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며 어떻게 했습니까? 4절은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고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온갖 박해와 환난을 참고 견디며 믿음을 지키는 것을 보며 감사했습니다. 또한 그런 교회를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 자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교회도 박해와 환난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교회도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나 환경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내와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영적인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감사와 자랑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교회를 다니고 싶습니까? 어떤 교회를 자랑하고 싶습니까? 믿음이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사랑이 풍성한 교회입니다. 환난 중에 인내하며 극복하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를 어떻게 세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세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감사하고 자랑하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믿음이 날마다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더 풍성해져야 합니다. 환난 중에 낙심하지 말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러 교회에 자랑하는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감사와 자랑이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함께 그런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