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신다 디모데후서 2:20-26 “그릇을 그릇되게 사용하지 말라” 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그릇을 적절한 용도에 맞게 사용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릇은 사용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만들었고 아름다운 그릇이라도 사용하지 못하는 그릇이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진 그릇입니다. 깨끗하지 않은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그릇을 사용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릇이 깨어지지 않았는지? 더럽지는 않은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의 핵심 내용은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해 쓰임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릇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을 받는 일꾼에 대해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일꾼,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일꾼에 대해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릇의 비유가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20절은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라고 합니다. 그릇의 종류입니다. 집에는 다양한 종류의 그릇이 있습니다. 금 그릇도 있으며 은그릇도 있습니다. 나무 그릇도 있으며 질그릇도 있습니다. 또한 그릇의 사용입니다. 주인이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으며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그릇을 만드는 재료도 다양하고 주인이 사용하는 용도도 다양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도 다양한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외모도 성격도 다릅니다. 지금까지의 성장과 지금 놓인 환경과 상황도 다릅니다. 각자가 가진 재물도 지식도 능력도 다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집, 즉 교회의 일꾼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모양과 크기의 그릇만 필요한 것이 아니듯이 서로 다른 은사와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서로 동역하며 더 풍성한 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그릇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쓰임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그릇에 대한 비유는 자신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9장 15절은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고 합니다. 바울은 전에는 귀히 쓰는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박해하며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귀히 쓰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방인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꾼으로 택함을 받은 그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악한 일에 쓰임을 받는 자도 있으며, 선한 일에 쓰임을 받는 자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일에 쓰임을 받고 있는 그릇입니까? 악한 일에 천하게 쓰임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선한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는 그릇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어떤 그릇을 귀하에 사용하십니까? 21절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고 합니다. 물론 어떤 재료로 그릇을 만들었느냐 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모양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하게 쓰임을 받는 그릇은 더럽지 않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로 만들었고 모양이 아름다운 그릇일지라도 깨끗하지 않으면 귀한 곳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깨끗한 그릇이면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며 선한 일에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임을 받는 그릇이 되기 위해 깨끗할 것을 권면합니다. 깨끗한 그릇은 거룩한 성도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은 거룩한 성도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 쓰임을 받는 그릇이 되기 위해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하나님의 요구이며 헌신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성도와 거룩한 교회를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행하십니다. 거룩한 성도, 거룩한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어떻게 주인이 귀히 쓰는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까? 바울은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세 가지 단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피하라, 따르라, 버리라’ 는 것입니다. 그 단어를 중심으로 어떻게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는지 나누었으면 합니다. 첫째,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22절 상반절은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피하라’(φεύγω)는 것은 ‘삼가하다, 멀리하다’ 는 뜻입니다. 무엇을 삼가야 합니까? 무엇을 멀리해야 합니까? 청년의 정욕입니다. 바울은 젊은 디모데를 향해 거룩하여 선한 일을 위해 준비된 그릇이 되기 위해 정욕을 피할 것을 권면합니다. 피해야 할 정욕은 육체의 욕망과 충동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정욕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베드로전서 2장 10절과 11절은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고 합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성도들을 향해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긍휼을 얻은 자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행인과 나그네와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람은 영혼을 대적하며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죄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마음의 정욕대로 살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타락한 욕망에 따라 살아갑니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악한 정욕에 따라 살아갑니다. 또한 충동적으로 행동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정욕을 피할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 5장 16절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고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결단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함께 선한 것을 따라야 합니다. 21절 하반절은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고 합니다. 본문에서 ‘따르라’(διώκω)는 것은 ‘추구하다, 노력하다’ 는 뜻입니다. 누구와 함께 따라야 합니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함께 따라야 합니까?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입니다. 이는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은 자가 따라야 할 덕목입니다. ‘의’는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시는 행동을,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겸손하고 전적인 신뢰를, ‘사랑’은 원수까지도 자비의 대상으로 삼는 깊은 애정을, ‘화평’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평온하고 화목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귀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2장 21절과 22절은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고 합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예수님 안에서 자라 성전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영적 성장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 성장할 때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함께 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2장 26절은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며, 영적인 한 가족입니다. 이에 한 성도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성도들이 함께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한 성도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성도들이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교회는 믿음과 공의와 사랑과 화평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를 격려하고 권면하며 함께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유익하지 않은 논쟁을 버려야 합니다. 23절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고 합니다. 본문에서 ‘버리라’(παραιτέομαι)는 것은 ‘거절하다, 거부하다’ 는 뜻입니다.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입니다. 이는 신앙과 생활에 전혀 유익하지 않은 논쟁을 의미합니다. 그 변론을 버려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런 쓸모없는 논쟁은 다툼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혜와 지식은 갈등과 다툼이 아니라 화합과 연합을 이루게 합니다. 그런 변론은 무엇으로 인한 것입니까? 디모데전서 6장 4절과 5절은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변론과 언쟁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시기와 다툼과 모독하는 말과 좋지 못한 의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상실하고 신앙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기에 다툼이 그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과 다툼의 대부분은 영적인 유익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종종 그런 쓸데없는 논쟁으로 인해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핵심은 무엇입니까?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깨끗한 그릇으로 선한 일에 쓰임을 받기 위해 겸손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깨끗한 그릇으로 어떻게 헌신해야 합니까? 24절과 25절은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라고 합니다. 그들은 주의 종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오직 주를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온유한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온유함으로 가르칩니다. 그들은 가르치기를 잘하며 적절하게 훈계할 줄 압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준비되고 합당한 그릇은 신앙과 성품과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을 때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25절과 26절은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고 합니다. 그들은 온유함으로 거역하는 사람들을 온유함으로 바로잡아 주어 회개시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합니다. 또한 마귀에게 붙잡혀 마귀의 뜻을 따르던 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수 있습니다. 깨끗한 그릇이 되어 선한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는 깨끗한 그릇은 죄를 범하며 마귀를 따르는 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게 합니다. 마귀를 떠나 하나님을 쫓게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악한 마귀의 올무에 매여 있던 자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그릇입니까? 하나님께 어떻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시기 위해 만든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런 그릇이 되기 위해 깨끗해야 합니다.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의와 믿음과 사항과 화평을 따라야 합니다. 무익한 변론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거룩한 헌신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와 올무를 벗어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귀하고 합당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