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1:6-8 폴 워셔 목사의 ‘복음을 잃어버린 이 시대를 향한 선지자적 외침이라는 부제가 있는 복음’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통해 완성된 구원 사역에 관한 메시지다’ 라고 합니다. 또한 복음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공의, 인간의 철저한 타락, 속죄의 그리스도의 피, 참된 회심의 본질, 구원 확신의 성경적 근거’ 등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단지 기독교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 자체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수단이며 능력입니다. 온전한 헌신을 위한 동기이며 목적입니다. 폴 워셔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소홀히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혹시 복음을 소홀히 하는 죄를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알려고 해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존 스토트는 디모데후서를 복음을 중심으로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❶ 복음을 지키라(1:2-18) ❷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2:1-26) ❸ 복음에 계속 거하라(3:1-17) ❹ 복음을 전파하라(4:1-22). 복음을 중심으로 디모데후서를 읽고 공부하면 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 주일 복음과 제자훈련이라는 관점에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제자훈련은 무엇입니까? 복음을 배우고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 복음을 전하는 훈련입니다.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복음을 통해 성장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단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무엇을 권면하고 있습니까? 8절은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는 디모데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위한 권면입니다. 우리를 향한 권면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에 함께 참여할 것을 권면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과 9절은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 합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 당한 환난에 대해 말합니다. 그의 힘으로 견뎌내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으며 마침내 살 희망마저 버렸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통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을 겪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통해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한 고난에 대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20장 23절과 24절은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합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그들과 함께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것을 나누며 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을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성령께서 알려 주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포기할 수 없는 사명, 즉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위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는 예수를 구주로 믿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거룩한 은혜와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은혜를 받은 자로 복음을 위한 고난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을 은혜요 영광을 여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복음을 위한 고난을 받기 위해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까? 첫째, 열정입니다. 6절은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라고 합니다. 디모데는 장로회에서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은사와 권면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사가 식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다시 디모데에게 안수함으로 하나님의 은사를 뜨겁게 하기 원했습니다. 디모데에게 불일 듯 일어난 하나님의 은사는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방언과 같은 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데 필요한 열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디모데도 안수를 받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면서 처음에는 뜨거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양한 상황과 원인으로 그 열정을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가 복음을 위한 열정의 회복을 위해 기억할 것은 무엇입니까? 7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디모데는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다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 고난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한 고난 앞에 비겁해졌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열정과 의욕이 식어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디모데를 향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두려움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능력은 복음을 위한 고난을 돌파하는 힘입니다. 사랑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자가 가져야 할 성품입니다. 절제는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 위한 결단입니다. 디모데가 두려움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회복할 때 복음을 위한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구원을 받고 직분을 받았을 때에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교회를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복음과 교회를 위한 헌신의 열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배와 기도의 자리는 점점 멀어져 있습니다. 교회와 복음을 위한 헌신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때로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교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떠한가요?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았나요? 복음을 위한 열정이 식어 있지는 않습니까? 영혼 구원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있지 않습니까? 이제 그 열정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다시 복음을 위한 심장이 뜨거워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에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 뜨거워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고난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부심입니다. 8절은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부끄러워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이는 창피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자랑하고 자부심을 가질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과 예수님을 위해 갇힌 바울입니다. 이는 복음과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믿음의 아버지이며 동역자 바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복음의 가치와 능력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바울은 부끄러워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자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않은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또한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이유입니다. 그 당시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4장 13절은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고 합니다. 이를 보면 바울은 어둡고 추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디모데가 올 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비록 늙고 병들고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는 악한 죄를 범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다가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 바울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존중할 때 복음을 위한 고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구원을 주시는 복음에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함께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한 고난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복음을 전하고 고난에 함께 참여하기 위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첫째,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진리입니다. 그 복음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행복과 소망이 복음에 있습니다. 그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생명을 건 헌신이 있습니다. 둘째, 복음에 합당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담대하지 전하지 못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다는 부족함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위한 고난에 참여하기 위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 복음에 대한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은 상황과 환경을 초월한 헌신을 가능하게 합니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복음은 고난 속에 전해졌습니다. 복음은 고난에 참여한 사람들의 헌신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고난에 참여할 때 우리의 심령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영적 부흥과 교회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고난에 참여하는 일에 거룩한 열정과 자부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위해 자원하는 불편함과 고난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